눈부신 아침 햇살이 덕숭산을 내려와 저만치 일주문 주위를 밝히고, 마침내 수덕여관의 초가지붕까지 노랗게 물들인다. 푸른 숲에서 비롯된 투명한 공기가 짧은 수면으로 무거워진 눈꺼풀에 힘을 실어주고 기분 나쁜 편두통마저 이내 씻어주나니 비로소 충남 북서부 여행의 백미라 일컫는 수덕사에 당도한 것임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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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가야산 남쪽 덕숭산 기슭에 널찍하게 자리를 튼 수덕사는 백제 말경에 창건되어 이후 고려 공민왕 때 나옹 선사가 중수했다고 전해진다. 일설에 따르면 흥선대원군 시절인 19세기에 이르러서도 규모가 가야산의 가야사보다 작은 수덕사였지만 오늘날 조계종 제7교구의 본사로서 충남 지방의 말사 36개를 관장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불교계 4대 총림叢林의 하나인 경허와 만공 같은 큰스님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키고 중창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총림이란 선원禪院과 강원講院을 모두 두고 있는 대찰을 일컫는다. 


공주 동학사, 청도 운문사와 더불어 3대 비구니 도량이기도 한 수덕사는 <청춘을 불사르고>의 저자 일엽 스님과 가수 송춘희가 부른 <수덕사의 여승>이란 유행가로 유명해진 곳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덕사가 수많은 사람들의 끊임없는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700년 세월의 풍파를 견디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는 대웅전 때문이다. 범인이 보기에도 결코 범상치 않은 이 대웅전에 대한 이야기는 아껴두었다 다시 꺼내놓기로 하고 일단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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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을 향한 모든 진리는 하나’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일주문을 지나면 금강, 사천왕문 그리고 새로이 지어진 황하정루의 근역성보관까지 거의 일직선으로 이어진 돌계단이 눈에 들어온다. 유홍준 교수가 그의 책에 적었듯, “둥근 원을 그리면서 돌아가던 그 넓고 한적한 길은 없어지고, 마치 중국 무술영화에서나 본적이 있을 듯한 (중략) 무지막지하게 값비싼 돌로 치장하여 돈 냄새를 물씬 풍기”는 돌계단이 바로 이것이다.  

과연 중창불사가 무엇을 위함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 어떤 명찰이라도 중창불사만 거치게 되면 그 즉시 아방궁 수준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수덕사가 그렇고, 해남 미황사, 그리고 대구 동화사가 그렇다. 아니, 일일이 헤아리기조차 힘들만큼 많다. 시대가 바뀌고 사람이 변했으니 어찌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입맛이 쓴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잠시 어지러운 마음에 눈을 아래로 향하고 돌계단을 오르다가 고개를 왼편으로 돌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서있는 7층 석탑을 바라본다. 1930년, 당시 수덕사 주지였던 만공 선사가 세운 것으로, 기단부 없이 바로 탑신과 옥개석으로 되어 있다. 비록 지방문화재 자료 제 181호에 지정된 것이긴 하나 소박한 멋과 기품 있는 자태를 갖춘 탑이라 개인적으로 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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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눈앞에 나타나는 높은 돌계단을 오르면 마치 막혔던 숨통이 터지듯 널찍한 마당이 나타난다. 보기에도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작은 샘터며, 낡은 단청이 매혹적인 법고각과 범종각이 눈에 들어온다. 이 두 집엔 각각 법고와 목어, 범종이 봉안되어 있다. 이 사물은 모두 소리를 통한 부처의 진리를 중생에게 전하여 해탈성불을 염원하는 교화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 하며, 아침저녁 예불 때 법고, 목어, 범종 순서로 치게 된다.


간결하고 단아한 목조 건물의 극치, 대웅전


자, 이제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정면을 바라보자. 그 곳엔 그저 범상한 사람이 보기에도 너무나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건물 한 채가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남향하여 앉아있는데 이것이 바로 수덕사를 빛낸 대웅전이다. 장대석을 쌓아 이룬 축대 위에 의젓하게 앉은 이 건물은 고려 충렬왕 34년인 1308년에 세워진 것으로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더불어 오래된 목조 건물로 손꼽힌다.

일제 강점기인 1937년에 해체 수리를 할 때 중수 연대가 적힌 붓글씨가 발견되어 이 건물의 나이를 알게 되었는데, 이처럼 건립 연대가 분명하고 그 역사성과 형태미로 인해 우리나라 목조 건축 사상 매우 중요한 건물로서 국보 제49호에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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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 건물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 중 하나인 수덕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에 기둥 위에만 공포를 얹는 주심포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팽팽함이 느껴지는 배흘림기둥이 경쾌하고도 탄력 있게 지붕을 떠받치고 있어 보는 이들에게 매우 간결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앞서 적은 것처럼, 칸수가 정면 3칸, 측면 4칸이면서도 가로와 세로 길이가 거의 비슷한 정사각형 구조를 하고 있다. 따라서 정면은 칸 사이가 넓고 측면은 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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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을 이루고 있는 기둥과 부재들은 본래의 단청이 다 지워진 뒤에 다시 단청을 입히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찰의 그것과는 다르게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세월의 연륜과 자취가 잘 드러난다. 측면을 보자면, 기둥, 들보 , 우미량 등의 부재가 기막힌 면 분할의 조화를 이루며 흰색 바탕에 노란색 단장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황토 벽 사이로 가감 없이 드러나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이는 단 하나의 수식어도 동원하지 않은 채 그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단아하고 정숙한 아름다움의 정수다. 그래서 우리나라 고 건축에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도 대웅전 여기저기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기둥으로 탈태한 지 700년 된 나무의 결을 쓰다듬으며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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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의 숨겨진 보물, 덕숭산과 수덕여관 


수덕사의 진면목은 대웅전에만 있지 않다. 덕숭산을 오르지 않고서야 어찌 수덕사를 다녀갔다 할 수 있을 것인가. 대웅전을 내려와 왼편 백련당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면 정상까지 이어진 소담한 등산로가 나타난다. 덕숭산은 산세가 완만하고 수목이 우거져있는 데다 물이 풍부하여 기암 사이로 흐르는 계곡 물이 작은 폭포를 이루거나 깊은 연못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때문에 계곡 주변에 크고 작은 암자와 누대가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는데, 만공 선사가 참선을 위해 창건한 정혜사와 소림초당, 그리고 역시 만공 선사가 1924년에 세운 25척 높이의 거대한 미륵불입상과 향운각, 만공탑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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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아래 유일한 여관이기도 한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로 화백(1904~1989)이 한때 머물면서 새긴 추상적인 암각화로 유명하고, 1939년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6)이 스님이 되기 위해 수덕사를 찾아왔다가 당시 조실이던 만공 선사로부터 “중노릇할 사람이 아니다”며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뒤 5년 동안 기거하면서 그림을 그리며 소일했던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고암이 수덕여관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선배 화가인 나혜석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 자주 드나들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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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나혜석이 그 집을 떠나자 고암이 사들인 다음 부인이었던 박귀희 씨에게 운영을 맡기고, 6.25 때에는 피난처로 사용하는 등 6년간 살면서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옮겼다. 집 옆의 두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는 고암이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2년 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다음인 1969년에 몸을 추스르기 위해 두 달 정도 머물 때 새겼다고 한다. 그러나 수덕여관과 고암의 인연은 고암이 1958년 프랑스로 떠나면서 끝나게 된다. 이후 수덕여관은 식당을 겸한 여관으로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 가요 <수덕사의 여승> 중에서.

 

땅거미가 진다. 이를 아는 듯 모르는 듯 법고 두드리는 소리가 산사를 휘감다 이윽고 속세의 하늘로 퍼져나간다. 그 소리는 마치 ‘마음을 비우고 가슴을 채워라’ 하는 듯하다. 과연 마음을 어찌 비울 것인가? 사실 나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수덕사 대웅전을 이루는 부재들과 퇴색한 단장의 아름다움이 주는 알 수 없는 감동이야말로 마음을 비우게 되면 얻게 될 소중한 선물임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자답하며 수덕사를 등진 채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2000년 5월


 

*이 기사를 작성한 바로 다음해인 2001년 2월 24일, 이응로 화백의 전처이자 수덕여관의 주인이었던 박귀희 여사가 숨을 거두었다. 이후 수덕여관은 주인 없는 빈집으로 5년 동안 방치되어 거의 흉가가 되다시피 했었다. 2006년 1월 16일, 우여곡절 끝에 수덕여관은 수덕사를 새 주인으로 맞이했다. 2007년 10월 5일, 수덕여관은 이전의 모습은 다 벗어버리고 새롭게 준공되어 수덕사 '선(禪)미술관'과 '수덕여관'이라는 새 문패를 달고 다시 문을 열었다.   -2008년 1월

Posted by 임재천